갑과 을은 역지사지하라

  • 입력 2015.02.09 09:26
  • 수정 2015.02.09 09:28
  • 기자명 김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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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 사회를 갑을사회라 불러도 크게 무리는 아닐까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와 권력아래서 기는 자, 강자와 약자의 모순과 갈등을 갑을관계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얼마 전에 대한항공 부사장에게 땅콩을 잘못(?)주었다고 이미 출발했던 비행기를 후진시키고, 승무원을 내려놓고 이륙하는 사건이 발생했었지요.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를 패대기치다시피 쓰려뜨리자 전국의 엄마들이 긴장하여 날마다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갑은 항상 승승장구하고 을은 늘상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민주주의 기본질서에도 어긋나는 것이지요.

빌레몬서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아주 짧은 서신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지도자요 엘리트인 사도 바울이 무명의 노예인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의 길을 인도하기 위해 청탁하는 서신인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갑에 해당하는 사도 바울이 을의 처지에 있는 도망나온 노예신분을 가진 오네시모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오네시모의 장래를 위해 간절한 부탁을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글에서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세상을 꿈꾸고 있었는가를 능히 상상할 수 있는 글입니다.
우리 사회에 갑과 을, 강자와 약자의 간극이 너무 크고, 갈등이 심화되어 있습니다.

1.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 씨의 땅콩회항사건이 갑질사건으로 떠올랐습니다.
2014년 12월 5일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항공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일등석에 타고 있던 조현아 부사장에게 승무원이 규정대로 땅콩을 봉지 째 보여주고 (알러지 등의 이유로) 의향을 물어보았다는데, 조부사장이 매뉴얼(규정) 내용을 문제삼아 "이게 맞느냐, 매뉴얼대로 행한 것이 맞느냐"고 질책하였답니다.

기내 서비스를 책임지는 사무장을 불러 서비스 매뉴얼 확인을 요구했고 후에 매뉴얼 내용을 보여준 후에는 오히려 조현아 부사장이 사무장에게 내리라는 지시를 하고, 기장에게도 회항할 것을 종용했다고 합니다.

실은 승무원이 규정대로 서비스 한 것이 맞았고, 조부사장이 착각한 것인데, 기내 사무장과 승무원을 무릎 꿇게하고 폭언 등 소동을 피우면서 결국 움직이는 항공기를 세워놓고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고요....

*조현아 사장은 부모 잘 만나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이고, 대주주의 한 사람인데, 승무원이나 사무장이나 한 식솔들 아닙니까? 설혹 실수가 있다고 해도 기내에서 눈치껏 주의를 주고 관용하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터인데, 대한항공 부사장이 무슨 대단한 권력직이랍니까?

*내 직원들을 보면 국제적 서비스 무대에서 수고하는 처지를 생각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어야 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갑-을 관계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종을 ‘둘로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인이 아니라 이방인, 외국인이란 말입니다. 로마제국이 패권을 행사하던 당시 사회에서 변방의 백성들을 노예취급 했다는 말입니다. 오네시모란 ‘쓸모있는 놈’이란 뜻입니다. 주인을 배신하여 물건을 훔쳐가지고, 멀리 로마까지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쓸모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쓸모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예로서 쓸모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으므로, 새로운 관계, 즉 형제의 관계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세계의 근간인 주-종 관계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청인 것입니다.
당시 그레꼬 로망 시대는 노예제도가 편만하게 인정되어 있는 사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대 혁명적인 제안을 한 것입니다.(빌레몬 1 : 10-12)

2. 서로가 심장이 뛰게 해주는 관계가 되야 합니다.
바울은 당대에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란 인물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나 그레코 로망사회에서 별로 꿀릴 것이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먼저 유대인으로서 긍지를 표현합니다. (빌립보서 3 : 5-6) 이방세계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행22:28), 헬라어와 헬라철학에 능통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심장은 분수처럼 펑펑 고동쳤습니다.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빌레몬의 입장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개인에게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골로새 시민사회에서 종을 소유한 모든 시민들에게 이미 공적(公敵)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오네시모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다른 노예의 주인들이 크게 반발할 터이었습니다.

편지를 쓰는 바울의 심장은 간곡하고도 절절하였습니다. 쿵쿵 뛰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그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심복’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프라그크론’인데 이 말은 ‘심장’ '창자‘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생생한 표현을 그대로 담아서 표현한다면, 그는 내 ’심장‘이란 말입니다. 그는 내 심장이요, 내 창자요, 내 형제요, 곧 나와 같다는 말이지요.

빌레몬 역시 성도들의 깊은 마음에 평안함을 얻게 해준 사람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빌레몬을 통해서 기쁨과 위로를 얻은자요,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합당한 예의를 지켜가면서 오네시모의 신앙과 삶을 잘 지도해주고 보살펴 주라고 부탁하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오네시모나 빌레몬이 제 3자나 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형제였을 뿐 아니라, 나의 다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해서 볼 때, 오네시모의 일은 내 일이요, 빌레몬의 입장도 내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3. 요즈음 어린이집 교사가 4 살배기 아이를 김치를 뱉었다고 손바닥으로 후려쳐서 아이가 쓰러뜨려지는 동영상을 국민들은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아마 CCTV가 안찍었으면, 극구 부인할 뻔 한 사건이었지요. 교사의 인간성의 타락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교사의 심성이란 아이들이 안보이면 보고 싶고 날마다 아이들과 가르치고 배우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 교사인 것입니다.

*갑을관계의 원인은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청와대의 비선실세 논난 덮어주기, 헌재와 대법원의 통진당해산, 자원외교 손실모르쇠 일관, 부자감세 공무원 등 약자들 세금증세, 김용판 대선개입 봐주기식 판결 등, 세월호 인양 슬쩍 비켜가기 등으로 인한 상탁하부정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회도 여기서 크게 비켜가지 못합니다.

요즘 ‘쿼바디스’란 영화가 대형교회의 부패와 모순, 성직자들의 윤리적 타락상을 고발한 영화인데 극장가, 네티즌 사이에, 뜻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세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안티세력이라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교단과 교회 안에도 갑을관계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사도바울처럼 겸손히 섬기고 헌신하는 모습으로 가야되는 것이 아닌가요? 정확한 펙트를 들이대면서 한국교회, 대형교회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하늘의 천둥소리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해서 예수님을 닮는 신앙과 인격과 실천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까? 교회는 책임윤리를 가지고 자성과 아울러 이 시대의 나아갈 길에 방향타를 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포여! 그리스도인들이여! 갑을 관계에서 형제와 동족의 관계로 성큼 양심개조, 인격개조, 신앙개조를 하는 도약을 보이는 새해가 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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