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

18일, 박중환 박물관장 강의로 열려

  • 입력 2015.06.29 11:30
  • 기자명 정찬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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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역사 공부모임 17번째 이야기 ‘영산강유역의 마한 문화 그 전개과정과 미래 전망’ 주제로 지난 18일 오후 2시부터 국립나주박물관 1층 체험학습실에서 박중환 관장의 강의로 열렸다.

 
 
강의 첫머리에서 박 관장은 “마한에 대한 독립된 역사서나 개설서가 없고 지금은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상황이므로 국립나주박물관의 책임이 크다”며, “영산강을 제대로 아는 것이 고대 문화의 객관적 연구 기초가 되고, 국위선양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아는 것이며 그 지역의 역사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 선행 되어야 할 것은 그 지역의 강을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영산강은 고려시대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뱃길을 따라 이주해 와 정착해 마을을 이룬 것이 영산포이고 그 영산포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본래의 이름은 금강, 금천이라 불리어왔으며 상·하류의 경사가 완만하여 조류(潮流)의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다.

국내 4대강 중에 가장 작은 강으로, 강 길이가 129km에 이르는 남한에서 5번째로 큰 강이지만 하구둑 건설로 농업용수 확보, 염해 피해 방지, 홍수피해 관리 등의 긍정적 효과 외, 연안 생태계 파괴, 하천오염 확대, 농수산생산물의 생산성 변화 등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영산강 유역 대표적 유물로 첫 번째는 고인돌이다. 화순 벽송리를 중심으로 한반도에 산재한 3만여기의 고인돌 중에서 2만여기가 영산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다.

두 번째 유물은 고분군이다. 마한고분 200여기 중에 30여기가 핵심 지역인 나주 반남, 영암 시종 등에 분포하고 있다. 흙으로 만든 무덤의 내부시설로는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다장제, 가족 공동체적 문화가 강한 장례풍습으로 신촌리 고분에서 보듯 상하 중첩된 매장시설과 무덤 외형이 다양하며 영산강 유역으로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 관장은 “마한의 중심인 목지국(目支國)의 왕인 진왕이 삼한 땅 전체의 왕으로 충남 천안, 전북 익산, 전남 나주 등지에서 세력을 폈으며,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던 기원전 194년 이전에 이미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다가 기원 후 3세기 후반 경에 백제에 의해 주도권을 상실했으나 영산강유역의 경우 고분의 면모로 보아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마한 고유 문화를 유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관장은 마한과 신미제국은 삼국지, 후한서 등의 중국 기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국 사료 등에 백제 이전의 선주 토착세력으로 한반도 서쪽에 북 백제, 남 마한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20~30년 전부터 목포대 강봉용 교수는 중국 진서에 최초 기록된 것이 유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크지 않고 90%이상의 학자들이 영산강 유역의 유물들이 마한 것이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진서 장화열전 (晉書 張華列傳)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 49년 춘 3월조에 동이, 마한, 신미, 침미다례(忱彌多禮) 등의 표현과 함께 마한 신미제국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마한은 신미를 아우르는 개념인지, 병렬 명칭인지, 왜 신미라는 명칭이 등장했는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후한서 동이지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은 경기, 충청, 호남지방에 자리 잡은 54개 부족 연맹체로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 가운데 선진, 종주, 중심세력으로 큰 규모의 나라는 집이 만여호, 소규모 나라는 수천 호에 이르나 역사의 기록에 왕 대력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여 가야기록과 대조되고 역사의 승자독식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마한의 마지막을 기록한 기록들을 나열해 살펴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대왕의 마한 병합 기록은 마한 일부세력의 병합으로 보이며, 서진에 대한 마한사신 기록의 소멸 시점(290년)은 역사를 그대로 보지 않고 백제권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고, 일본서기 신공기(369년)에 야마또 정권이 신라, 남만(韓), 친미다례를 도륙 했다는 기록은 왜와 백제가 통교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이병도).

백제의 웅진천도(475년)는 백제 계루왕이 죽자 아들인 문주가 서울을 한성에서 지금의 공주로 천도한 백제의 1차 멸망을 말하며 동성왕 20년의 무진주 출병(498년)은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처음으로 실질 지배한 시기이며, 나주 복암리 3호분 석실옹관의 연대(하한 550년 전후)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로 실제로 6세기 중반까지 마한세력이 존재했으며 백제의 마한 병합은 북쪽 에서 남쪽으로 세력이 축소 되어가는 점이적인 과정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하였다.

한편 '삼한에서 삼국으로의 변화는 죽순 에서 대나무로의 변화처럼 평화로운 역사 발전이었다'고 말한 역사학자 천관우의 주장에 대해, 백제의 마한병합 과정(온조왕 27년)은 위장전술과 기습점령, 항전의 연속이었으며 원산과 금현 두 성은 6개월 동안 저항하다 함락된 후 두 성에 살던 마한인들은 한수(漢水) 이북으로 강제 이주 당했으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이 금현이 현재의 나주일 것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끝으로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고분 분포도를 보면서 돌무덤이 태반이던 삼국시대의 무덤들 중에서 독특하게 옹관고분을 만들었던 이유는 문화적으로 고립된 섬 같은 지역의 광활한 황토가 원인이었고 무더기로 발견되는 소규모의 옹관들은 어린애들의 무덤이거나 2차장(二次葬)으로 추측된다.

무덤조성방식의 변화와 장법의 중요한 단초는 물론 마한인 들의 내세관(来世観)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의 토기무덤들도 2차장의 대표적인 사례로 시신을 그대로 묻으면 부활의 시기에 최후의 심판 후 다시 부활할 수 없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관념(Ossuar)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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