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 '신촌리 금동관, 그시대를 만나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재조명 성료

  • 입력 2017.11.27 13:48
  • 기자명 정찬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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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인 12월로 발굴 100주년을 맞는 국보 제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발굴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가 11월17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 까지 국립나주박물관 1층 세미나실에서 강인규 나주시장, 김판근 나주시의회 의장, 장행준 나주시의회 부의장, 이민준 전라 남도의회 의원, 박성수 광주.전남연구원장, 송의정 국립광주박물관장, 한재섭 전주 여명카메라 박물관장을 비롯한 후원회원, 시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나주시와 국립나주박물관(관장 박중환)이 주최하고, (사)국립나주박물관후원회 (이사장 이순옥)가 후원한 이번 국제학술 대회에서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은 개회사를 통해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 발굴됐던 금동관이 올해 12월로 발굴 100주년을 맞는것을 계기로 나주시와 함께 특별전을 마련했는데, 내년 1월7일까지 열리는 이번의 특별전과 오늘의 학술대회가 발굴로부터 100년이 다 되도록 하지 못했던 문화재 조사 연구의 본격적인 시작을 이루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인규 나주시장은 축사에서 “우리시는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을 재조명하고 미스터리한 마한의 역사를 대국민에 홍보하고 이해시키는 특별전을 지난 9월부터 이곳 나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며 “또 마한 역사 만화발간, 마한의 고인돌 복원, 마한 문화 축제 개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3년 동안 ‘반나부리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해 오고 있다”고 말하고, “마한의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금동관에 대해 심도 깊은 전문가들의 논의를 통해서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역사적 시간이 될 것”이라며 “국제학술대회 를 통해 동시대의 몽고와 일본의 금동관에 대한 세세한 분석과 연구 성과를 토대로 누가 이 나주의 금동관을 제작했고 어떤 세력이 창작했으며, 그들의 정치적 성격은 어땠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라고 강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황보창서 국립나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진행된 1부 ‘동북아시아의 금동관과 문화교류’ 에서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 재단 이사장의 ‘나주 신촌리 금동관 발굴의 의의와 100년의 발자취’란 주제의 기조 강연에 이어, 제1주제로 정인성 영남대 교수의 ‘1917년 나주 반남면 고분 발굴 이야기’, 제2주제로 에렉젠(몽골과학 아카데미 교수)의 ‘몽골국에서 발굴된 투르크 제국 빌게 카간의 황금관에 대한 고찰’을 김장구 동국대교수의 통역으로 발표하고, 제3주제로 다카타 칸타교수(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관을 둘러싼 백제· 영산강 유역과 왜의 교섭에 관한 예찰’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이지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사회로 진행된 2부에서는 ‘나주 신촌리 금동관과 마한 정치체의 성격’이란 대주제 아래 제4주제 이진우 국립나주박물관 학예사의 '제작기법을 통해서 본 나주 신촌리 금동관 의 계통', 제5주제 이경화 문화재청 감정관실 학예사의 '장식문양을 통해서 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계통', 제6주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의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제작 주체', 제7주제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나주 신촌리 금동관 창작자의 정치적 성격' 등의 주제발표를 하였다.

주제발표가 끝난 후 임영진 전남대 교수의 사회로 다케스에 준이치(武末純一) 후쿠오카 대학교수, 박보현 대전보건대학 교수, 정재윤 공주대학교수, 문안식 동아시아역사문화 연구소장과 발제자 전원이 함께하는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에서는 신촌리 금동관의 계통과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의 장이 펼쳐졌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이 금동관을 만들고 사용하던 사람은 누구인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정치체제 와 백제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 되었는가?’ 에 대해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교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제작 주체’ 발표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금동관은 백제 중앙에서 하사한 물품으로 추정하는 정도였고 논의가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신촌리 9호분의 경우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인 정치세력과 관련된 산물로, 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세계, 즉 마한의 존재를 확인 시켜주는 징표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낙중 전북대교수는 ‘나주 신촌리 금동관 창작자의 정치적 성격’이란 주제발표에서 “사여의 주체는 금동관 성격파악의 전제가 되므로 금동관을 누가 만들었는지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형태, 문양, 제작 기법 등에서 보이는 어느 정도의 정형성과 금공품이 가지는 제작처의 한정성을 고려하면 백제 금동관은 한성에서 제작돼 지방의 다양한 세력에게 분배됐고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신촌리 금동관은 백제왕권이 하사한 위세품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그런데 그것을 문헌 기록에서도 시행 여부가 분명치 않은 4~5세기의 지방통치 체제에만 집중해 담로제나 왕·후호제에 결부시키고자 하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영산강 유역의 경우는 위세품을 통한 정치 관계 형성이 가장 늦고, 대외적으로도 가야, 왜 등과 활발히 교섭했다”며 “이 중에서도 신촌리 9호분을 비롯한 반남지역 집단은 지역 사회내부에서도 연맹왕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통합을 보여 단순한 백제의 세력권보다 좀 더 고도의 정치체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반남지역 정치체제는 전통적인 옹관분 축조 세력의 기반을 바탕으로 영산강 유역의 중요한 세력이 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6세기 중엽 이후에는 백제의 완전한 지방으로 편제된 것으로 전한다.

한반도에서 처음 출토된 금동관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를 상징하는 유물로, 일제 강점기인 1917년 12월23일 조선총독부 조사원 야스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조선인 인부들을 동원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했다. 발굴 당시 대형 독널 안에 보관돼 있었는데 화려한 고대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당시 금동관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들이 출토됐지만 암울한 식민지 시대 상황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곧바로 고향 나주를 떠나 경성(京城)으로 옮겨졌다. 이후 100년이 지난 나주 신촌리에 국립나주박물관이 세워지고 고향을 떠났던 반남 고분군 문화재들이 한 자리에 다시 모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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