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기억하는 슬픔'

"가끔 슬픔의 공간을 사적 경계를 넘어서 공적 영역으로 확장해 보려는 유혹이 있었지만,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 입력 2023.06.28 12:50
  • 수정 2023.07.04 14:09
  • 기자명 정순남 (동신대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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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남 동신대 석좌교수
정순남 동신대 석좌교수

‘86년 11월 늦가을,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인 영산강을 떠났다. 차마 버스를 바로 타지 못하고 한참을 더 걸었다. 완벽한 ’헤어질 결심‘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임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텅 빈 슬레이트 지붕 넘어 헐겁게 남아 있던 홍시들과 겨울 초입 빛바랜 코스모스길의 스산함은 잊을 수가 없다. 가을걷이가 마무리된 후 흥겨웠던 기억도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버린 시절이기도 했다. 70년대 불기 시작한 산업화로 상당수의 젊은이가 이미 마을을 떠나버린 것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정관수술 동참‘ 구호가 지방소멸의 전조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엊그제 산림자원연구소를 지나 나주호, 불회사와 미륵사를 다녀왔다. 가뭄이 길었던지 주암호 다음으로 크다는 나주호는 갈색 바닥을 보였고, 불회사와 미륵사는 오가는 사람이 없이 적막하였다. 유년기의 터전이었던 영산강의 모천, 단골 소풍 장소였던 불회사와 미륵사 그리고 낯익은 지명들! 고향을 떠나고, 삶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짠한 이웃들의 “슬픔을 기억하는 슬픔”은 견디기 힘든 슬픔임은 어찌할 수 없었다.

평생 동네 머슴이었던 희곤이가 배앓이로 죽었던 그 해이기도 했다. 도장굴 양반의 큰아들이었던 희곤이는 늦결혼 후 어린 아들을 남겼다. 6·25 때 빨치산이 머물렀다던 성적굴 천수답 산두밭에서 할아버지를 따라 참깨를 털거나 가재를 잡던 어린 소년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큰 아픔이다. 다리를 절었던 희곤이의 부인이 아이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슬픈 소문이 무성하였다. 서울에 연고라곤 아이의 고모 순이뿐이었으니 그녀를 찾아갔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불회사 
불회사 

이웃들의 슬픈 사건이 슬프다는 것조차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요즘 하루가 멀다고 방송에 오르내리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 영아 유기사건, 청소년 자살사건, 부모와 자식 간의 존비속 살인사건, 과외선생을 유인하여 토막 기획 살인하였다는 사건들. 이 끔찍한 뉴스마저도 슬픈 느낌조차 없다. 이미 영악해지고 이기적이고 공동체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아버린 탓이리라. 나주교통, SRF 소각장, 골프장 인허가, 주몽 세트장 철거, 축산악취 문제 등 동네의 민감하고 안타까운 야기들도 접한다. 이런 야기들조차도 타인들이 나서 해결해야 할 공정과 소통의 영역이라고 심드렁했다. 나에게 슬픔은 토지에서 나오는 월선이나 구천에 대한 슬픔 같은 것이거나, 무명의 백성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주어지는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녹두꽃처럼 스러졌다는 대목이 가장 가슴 찡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깝게는 세월호 침몰, 천안함 피격, 이태원 참사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전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같은 公有된 슬픔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긴 하였지만 뼈아픈 슬픔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전두엽이 어떤 영역에 각인된 이 ’슬픔을 기억하는 슬픔“에 대한 기재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 뇌피의 영역은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대에 관한 것이었다. 청각장애를 앓던 재선이가 수로에서 목숨을 잃었다. 만봉천의 물이 부족한 시절이라 나주호의 물을 봉황면에서 세지, 반남과 왕곡면까지 보내기 위해 지하에 건조된 거대한 水路터널 바로 그곳이었다. 지대가 높았던 다도면 쪽에서 유입된 물의 압력으로 솟구치는 콘크리트 터널 입구만 보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도 여름이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수로로 몸을 날리는 큰 동네 아이들의 용감함에 한없는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자연의 생명력은 질기고도 단단하였다. 재선이도 어디서 흘러온 처자와 결혼하였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한동안 불편한 몸으로 아이를 이끌고 전답을 관리하던 그녀도 머지않아 동네를 떠났다. 마을 사람 모두 그러겠다고 짐작했고 누구도 자식을 남기고 간 그녀를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어린 손주들을 자랑스럽게 데리고 다니던 도장굴 양반과 재담이 양반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졌다.

오백 년을 이어온 조선 정치권의 당파싸움, 지배계급의 부정부패, 양반계급의 변화에 대한 저항, 일제의 수탈과 해방 이후 전쟁으로 인한 황폐해진 땅. 그 땅에서 힘겹게 살았던 부모님대의 시절은 더욱 슬프고 거칠었을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쌀밥과 고기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 태어나 이들에게 명명된 850만 베이비 부머세대들 또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한 희생양이었다. MZ세대들이 아무리 힘든 시대를 야기한들 나에게 무슨 슬픈 공명이 있겠는가! 시대를 견주어 야기하는 것은 이미 ’꼰대‘나 ’라떼‘라고 낙인이 찍혀 버렸다. 크든 작든 시대마다 영광과 아픔은 반복된다.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떠나고  삶의 아픔을 야기하고 불행한 이웃들의 “슬픔을 기억하는 슬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인 것임은 어찌할 수 없다. 

평생 나를 기득권 세력으로 강제 편입하게 했던 고시 합격은 그 이후 유학,  해외 생활과 전 세계를 둘러보게 하는 특혜를 주었다. 권위적 엘리트 완장 대원의 자부심에 뇌동하여 밤새워 일했던 젊은 시절은 가정사의 개인적 굴곡도 가져왔다. 우월적 권력작용, 일방적으로 결정한 글로벌 통상(UR, WTO, FTA 등)정책과 산업, 에너지 정책들은 조국에 경제적 富도 가져다주었다. 압축된 시간 내에 집행된 정책들은 심각한 환경파괴, 불균형적국가발전, 출산율 저하와 지방소멸, 빈부격차의 확대 등의 비싼 부작용도 가져왔다. 모두가 야기하는 것처럼, 한국민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높은 교육열, 혁신적 기업가 정신, 재벌과 결탁한 독재정권의 저리 차관, 국민이 저축한 목돈의 저이율 특혜 보조금 정책 등과 맞물려진 결과물이었다. 세계가 가장 놀라워하는 민주주의도 80년 5.18 민주화운동과 한 젊은이의 분신을 기점으로 한 노동 혁명 등을 통해 정착되었다. 이제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동,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도움을 요청하는 시대가 되었다.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떠나고  삶의 아픔을 야기하고 불행한 이웃들의 “슬픔을 기억하는 슬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인 것임은 어찌할 수 없다. 지금도 꿈속에서 재선이, 희곤이, 그들의 아내와 아들들을 만나곤 한다. 어떤 심리학자의 조언대로 슬픔을 슬픔으로 통증을 느끼기보다는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려고 불편한 노력을 한다.

가끔 슬픔의 공간을 사적 경계를 넘어서 공적 영역으로 확장해 보려는 유혹이 있었지만,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신형철 작가처럼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슬픔은 어떤 식으로든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더 이상의 치명적 아밀로이드(amyloid)가 퇴적되기 전 영산강이 그 치유의 땅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굳이 최근의 사회보장제도와 비교를 한다면, 희곤이의 맹장염 배앓이는 의료사각지대의 희생양이었고, 재선이의 익사는 방치된 水路라는 공유재산 관리의무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아내들과 아들들의 곤궁한 삶은 장애인과 취약계층 보호시스템 부재의 산물이었다.

*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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