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향사와 현종의 나주 몽진

역사는 기록되어지는 것이 아닌 미래를 기획하는 중요한 소재

  • 입력 2023.07.12 16:56
  • 기자명 정순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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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남 동신대학교 석좌교수
정순남 동신대학교 석좌교수

얼마의 세월이 지났건 역사는 단순히 기록되고 해석되고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나침판 역할을 할수도 있다. 더 나아가 사건으로 분해하여 관광문화 자원의 소재나 자부심의 밑천이 될 수도 있다. 요즘 지자체마다 역사자원을 발굴하고 스토리텔링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수시는 이순신 장군, 곡성군은 심청, 장성군은 홍길동, 완도군은 장보고,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영암군은 왕인박사, 등을 활용한 지역 관광마케팅을 하고 있다.

“왕건이 탐낸 쌀”이 전라남도 10대 명품쌀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나주쌀에 대한 작명 아이디어가 대단히 참신하다. 흔히 나주는 나주배와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와의 인연도 적지 않다. 왕건, 오씨부인, 고려창건, 현종의 몽진, 심향사, 팔관회, 나주 본관 55개 성씨 등은 나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대부분의 고려시대 유산이 북한땅에 있어 고려에 대한 관심이 덜한 점을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기회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팔도 성씨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은 것은 고려와의 인연 중 하나다.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2015년) 인구 1,000명 이상인 본관은 858개로 전체 인구의 97.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1,000명 이상인 성씨 중 나주를 본관으로 가진 성씨는 55개이며, 나주의 옛 이름(금성나씨, 금성범씨 등)을 포함한 성씨까지 합하면 7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남평문씨(380,530명), 나주임씨(236,877명), 반남박씨(139,438명), 나주나씨(108,139명), 나주정(鄭)씨(93,845명), 나주정(丁)씨(82,863명)만 해도 100만 명이 넘는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의 앞자를 따올 만큼 나주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주-고려의 역사적 사건을 나주의 자긍심을 높이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다양한 아이디어로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문화가 꽃피웠던 고려시절 심향사는 나주의 상징적 사찰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오 스님(심향사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미륵원이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고 고려 7대 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으로 나주에 몽진하여 머물면서 신황사로 불렸다. 그 후 지역 신도들의 마음 수양 공간으로의 염원을 반영하여 심향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고려와의 인연은 태조 왕건이 나주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할 무렵 지금의 나주시청 입구 좌측 완사천에서 오씨부인을 만났는데 그때 고려 2대 왕인 혜종을 얻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성오 스님은 심향사 아미타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이 종이재질이 갖는 의미를 특히 강조하였다. 좌상은 종이에 칠을 한 건칠불상으로 고려시대 13∼14세기경에 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 나주지역을 비롯한 한반도에 종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종이는 책을 의미하며, 책은 문자를 해독하고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주가 전라도의 중심도시가 된 배경은 이러한 종이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성오 스님의 해석에 의하면 나주 금성산에 6개의 산신각이 있는데 산신을 상징하는 호랑이는 자연을 의미하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것은 자연을 섬기는 것이고 이는 오늘날 자연보호운동과 유사한 것이라고 한다. 금성산에도 호랑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중국이 세계 최초의 과학적 발명품이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인쇄술 발명국은 한국이며,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미 「직지심경」(1379년)이 세계 최초로 공인되었고, 세계 최초로 목판인쇄술도 석가탑에서 확인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전(국보 제126호)은 길이 약 650㎝, 폭 6.5~6.7㎝의 서체로 인쇄된 두루마리이다. 서지학자들은 중국의 측천무후 사망(705)직후에 신라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무튼 고려와 나주와의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은 나주출신 장화황후 오씨와 왕건사이에 제2대 혜종(왕무)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오씨는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서 전남 해안을 점령한 뒤 한반도 변방 나주에서 만난 여성이다.

충주 유씨 가문의 신명순성황후는 충청·강원권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때도 크게 기여했다. 후계자 문제로 나주 오씨의 소생이자 왕건의 장남인 왕무를 제거하기 위해 신명순성황후의 수 많은 음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왕건의 지원과 왕건의 측근이었던 박술희의 노력에 힘입어 혜종(왕무)은 고려 건국 3년 뒤인 921년 열 살의 나이로 정윤(正胤 : 고려 초기 임금의 적자를 정윤으로 부름)이 되었다.

태조 왕건이 죽기까지 22년간 후계자 생활을 하면서 후삼국 통일 전쟁에 참가하여 공로를 세운 혜종은 943년 서른두 살 나이로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했다. 아버지를 계승한 뒤에도 충주 유씨의 집요한 압박을 받던 그는 2년 뒤 서른네 살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 뒤 충주 유씨 출신 이복형제인 정종(왕요)과 광종 (왕소)으로 이어지는 숨가뿐 권력다툼이 이어졌다.

나주에 몽진을 왔던 현종은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강조의 30만 대군이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했다. 나주로 몽진한 이유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그의 조부인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지였던 나주를 지배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제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의 고향이 나주였던 것으로 인해 고려 황실에 있어서 근거지와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이후 거란의 두 차례 침입으로 피난을 다녀오기도 했으나 결국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역사는 늘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다.

나주 몽진후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현종은 전후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정변 이후 쇠약해진 왕의 힘을 키우기 위해 지방세력을 규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한반도 최초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완성하였다.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오랜 여진족과 고려의 전쟁여파로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고, 초조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追贈)하고 문묘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인도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팔관회는 한반도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결합되어,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토속신이나 부처에게 기원하던 행사다. 고려 최초의 팔관회는 태조 원년(918년)에 개경과 서경에서 개최되었다.

여덟 가지 계를 의미하는 팔관은 ① 살생하지 말 것, ② 도둑질 하지 말 것, ③ 음란한 일을 하지 말 것, ④ 거짓말 하지 말 것, ⑤ 술 마시지 말 것, ⑥ 몸에 꽃 장식을 하거나 향을 바르지 말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하지 말고 그런 것을 하는 데 가서 보거나 듣지 말 것, ⑦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 것, ⑧ 때가 아닌 때 먹지 말 것이라고 한다. 마치 기독교의 10계명과 유사하고 동양의 공맹의 가르침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시라도 경계하지 아니하면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 역사의 교훈이듯, 팔관회는 많은 비용과 사치와 향락으로 폐단도 많았다. 성종 6년(987년)에 폐지되었고, 현종 원년(1010년)에 부활되어 100여 년 동안 성행했으나 이후에는 점점 쇠퇴했다.

나주는 전라도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혁신도시가 들어서고 17개의 공공기관이 이전하면서 활력을 더해가고 있다. 국립나주박물관을 중심으로 마한의 역사가 하나둘 밝혀지고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너지공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재들이 몰려오고 에너지수도를 향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에너지공대에서 연구가 진행중인탄소중립기술은 향후 나라의 명운을 가늠할 중차대한 과제다. 현종의 나주 몽진이후 고려사회는 정치문화, 사회제도를 정비하고 훗날 조선 500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려와의 역사적 인연들을 나주발전의 계기로 만드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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