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성론과 동지가

  • 입력 2007.02.27 15:54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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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신문 박철환 기자

필자가 대학생이었던 8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던 사건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것이 아마 품성론일게다.
일반 시민대중을 무조건 지도하려고만 했던 당시 학생운동의 풍조에 자신의 품성을 되돌아보게 만든 품성론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그렇게 크게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당시 학생운동권내에 교조주의 또는 소영웅주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품성론은 일반대중을 가르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겸손히 하고 일반대중보다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자신부터 희생하라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였고 그렇게 깨달은 학생운동권은 당시 상당한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심(下心). 마음을 내린다는 것. 품성론과 하심은 아마 같은 말일 것이다.
새삼스럽게 20년이나 지난 일을 회고해보는 것은 바로 나주시공무원노조의 행태 때문이다.
아마 2005년도의 일이었을께다. 당시 정부는 공무원노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제해산을 명했으며, 이에 공무원노조는 총파업이라는 강수로 맞선 적이 있었다.

노조원들의 찬반투표도 진행됐고, 출근거부라는 총파업까지 긴장감이 감돌았었다.
당시 필자도 태생적으로 운동권에 대한 동지적 연대감이 있어 취재 차 카메라를 들고 총파업의 긴장감이 감도는 나주시청을 찾았었다. 이미 정문에는 전경들이 배치돼 있었고, 간부공무원들은 현관을 지키며, 총파업을 무산시키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허나 당시 기자의 기대감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여느 시위현장에서 일어날 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이 어린 대학생들이 웃옷이 찟겨지고, 신발이 벗겨진채 머리끄댕이를 붙잡혀 경찰들에게 끌려가던 일도, 노동자 농민들이 머리가 깨지고, 전경들의 방패에 맞써 온몸을 던진 상황도, 아니면 여성노동자들이 주먹 불끈 쥐고 최류탄 속에 눈물 콧물 쏟아내던 상황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필자는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 운동의 원칙이나 정도가 따로 있을리는 없겠지만, 노조원들이 상의가 찟겨지고, 신발이 벗겨진 채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공무원노조 만세! 를 외치는 당당한 투쟁성을 기대했었다.

공무원노조의 권리를 말살하는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야 한다며, 당당하게 투표를 강행하고 투표함이 부당한 권력에 유린당해도 온 몸으로 투표함을 지켜내는 그런 처절한 투쟁성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필자의 기대감은 너무 지나쳤는지, 찬반투표는 도둑질하듯 비밀리에 진행됐고, 총파업은 무슨 청소운동인지, 환경활동인지를 핑계삼아 경현리 저수지로, 중앙로로 007작전 하듯이 진행됐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도 투쟁방식의 하나였는지 몰라도 당시 필자는 심한 자괴감을 가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런 공무원노조의 투쟁방식을 지난해에도 또 목격했다. 행자부의 사무실 패쇄 조치에 따른 노조의 반발투쟁 현장이었다. 당시 간부공무원들은 그 누구하나 간부로써 하위직 직원들에게 큰소리치는 이 없었고, 당시 노조원들은 로비 복도를 점거하고 강력 반발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무원노조는 행자부의 사무실 패쇄조치에 맞서 시청현관 앞 천막농성으로 맞섰다. 엄동설한 겨울철 노상천막농성은 그만큼 결의의 찬 노조입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도 필자의 기대감에 불과했다. 노조는 불과 며칠만에 농성천막만 밖에 세워놓고 슬그머니 원 사무실로 복귀했고, 간판도 혁신동아리로 바꿔 달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도 공무원노조의 투쟁방식일까?


각설하고 필자가 대학 2학년 때 노래 한 곡을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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